
2016년 7월, 사드(THAAD) 배치 결정 이후 한국 영화계에 불어닥친 ‘한한령(限韓令)’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 산업의 지형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최근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감지되는 정치·외교적 해빙 무드, 그리고 2024년 베이징국제영화제에서의 한국 영화 신작 상영 재개는 우리 업계에 ‘거대 시장 재개방’이라는 장밋빛 기대를 품게 합니다. 하지만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최신 현안보고서인 <중국의 한한령 해제 움직임과 영화부문 대응방안>을 면밀히 뜯어보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영화 비평가이자 산업 분석가로서 필자는 오늘, 이 보고서가 제시한 대응방안의 실효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한국 영화가 나아가야 할 진정한 독립적 생존 전략을 논하고자 합니다.
1. 10년의 암흑기, 수치로 본 한한령의 파괴력
한한령 이전인 2015년, 중국은 한국 영화 완성작 수출액 1위를 차지하던 명실상부한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드 사태 이후인 2017년, 수출액은 전년 대비 무려 55%나 급락하며 수직 낙하했습니다. 2016년 <암살> 이후 2021년 <오!문희>가 개봉하기까지 약 10년 동안 중국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기술 서비스’ 부문의 궤멸입니다. 한때 5,480만 달러에 달했던 VFX 기술 서비스 수출액은 사드 배치 이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덱스터와 같은 국내 유수의 업체들이 중국의 대작 영화 작업에 참여하며 기술적 우위를 점해왔으나, 주요 창작 인력이 한국인인 경우 제작 허가가 나오지 않는 등 당국의 노골적인 배제가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영화 산업은 중국이라는 거대 자본 조달처를 잃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글로벌 OTT 플랫폼인 넷플릭스가 한국 영화 투자 시장을 독점하고 기획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산업적 고찰은 골든상상의 산업 뉴스 카테고리에서 더욱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2. 이데올로기의 도구: 중국 영화 시장의 ‘주선율’ 미학
우리가 한한령 해제를 낙관하기 힘든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 그 자체에 있습니다. 시진핑 정부 아래에서 영화는 단순한 문화 상품이 아니라 ‘중화민족 부흥’과 ‘중국몽 실현’을 위한 강력한 이데올로기 홍보 수단입니다. 2018년 영화 정책 기능을 담당하는 국가영화국이 당 중앙 선전부 직속으로 이관된 것은 영화가 곧 당의 목소리임을 공식화한 사건입니다.
현재 중국 박스오피스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주선율(主旋律) 영화’들입니다. 154.6억 위안이라는 경이로운 흥행 기록을 세운 애니메이션 <너자 2>나, 애국주의와 반미 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장진호>, <특수부대 전랑 2>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시장 구조 내에서 한국 영화는 표현의 자유와 사회 비판, 서사의 다양성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언제든 ‘잠재적 위험 콘텐츠’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중국 당국이 한국 영화를 일부 개방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입맛에 맞는 비정치적 장르나 자국 영화 산업을 자극하기 위한 ‘선택적·점진적 완화’에 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영화제 상영이라는 유화적 제스처가 곧 극장 상영과 공동제작의 전면적 허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순진한 발상일 수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3. 관(官) 주도 대응의 딜레마: 공적 에이전시의 위험성
보고서는 한한령 해제에 대비해 영화진흥위원회 중국사무소를 ‘중국 영화산업 대응 센터’로 격상시켜 민간의 진출을 지원하는 ‘공적 에이전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정치적 리스크가 여전하니 관이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방패막이가 되어주겠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 주도의 대응 모델은 양날의 검입니다. 중국 관영 주체들과의 대화 채널 복원과 한-중 FTA 공동제작 협정의 실질적 복원은 제도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지만, 자칫 민간의 창의성과 역동성을 관료주의적 검열의 틀 안에 가두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중국 당국의 입맛에 맞는 프로젝트를 선별하여 매칭하는 ‘컨설팅’이 강화될수록, 한국 영화 고유의 날카로운 사회 비판적 색채는 희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미 중국 내에서는 한국의 인력과 자본이 배제된 채 한국 IP만 소비되는 ‘IP 약탈’ 구조가 고착화되었습니다. 한국 웹툰 원작의 <문맨>이 약 5,859억 원의 흥행 수익을 올리는 동안, 한국 창작자들은 크레딧에서조차 소외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관의 대응이 이러한 실질적인 수익 배분 구조와 크레딧 주권을 지켜내지 못한 채, 단순히 ‘교류 행사 재개’에만 매몰된다면 이는 실효성 없는 예산 낭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4. 시네마의 확장과 IP 주권: 한국 영화의 자존을 위한 제언
결론적으로 한국 영화 산업은 중국 시장의 개방을 구걸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보고서가 제시한 다자형 협력(한국+중국+타 국가) 모델은 자본의 다변화라는 측면에서 유의미하지만, 그 중심에는 반드시 ‘한국의 IP 주권’이 자리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중국 시장을 겨냥한 ‘맞춤형 콘텐츠’가 아니라,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높은 예술적 성취를 통해 중국이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드는 전략을 취해야 합니다.
한한령 해제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다시금 거대한 시장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 영화 산업을 중국의 거대 자본과 이데올로기 아래 종속시킬 수도 있는 위협입니다. 정부는 단순히 ‘관 간 대화 채널 복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민간 제작사들이 독자적으로 계약을 맺고 수익을 배분받을 수 있는 법적·기술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또한, 숏폼과 웹드라마 등 급변하는 현지 미디어 환경에 맞춘 유연한 대응 체계를 구축하여, 전통적인 극장 상영에만 목매지 않는 영리한 배급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시네마는 국경 안에 갇힌 예술이 아니며, 진정한 걸작은 정치적 장벽을 넘어 관객과 만납니다. 한국 영화가 중국 시장이라는 파도를 다시 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관 주도의 행정이 아니라, 어떤 제약 속에서도 빛나는 창작자의 자유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IP 주권 선포입니다.
참고자료 및 출처:
- 영화진흥위원회(KOFIC), ‘중국의 한한령 해제 움직임과 영화부문 대응방안’ (KOFIC 현안보고 2025-04), 2025.
- 박희성·임대근, ‘중국의 한한령 해제 움직임과 영화부문 대응방안’ 책임 및 공동연구.
- 藝恩娛數(엔데이터), 중국 영화 박스오피스 통계 및 순위 데이터.
- 서울경제, ‘중국, 트럼프 관세 폭탄에 할리우드 영화 수입 축소’ 관련 보도, 2025.04.10.
- 중국 영화出版社, ‘2024년 중국 영화산업 연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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