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한국영화가 유럽에서도 꽤 잘 팔리고 있을 거라 막연히 믿고 있었습니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파급력을 직접 목격한 세대니까요. 그런데 작년에 프랑스 친구와 나눈 SNS 대화 한번이 그 믿음에 금을 냈습니다.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가 파리에서는 소수 마니아만 찾는 아트하우스 상영관에서 조용히 걸렸다가 내려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흥행수표라고 생각했던 영화들이 유럽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었습니다.

화려한 성과 뒤에 켜진 경고등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지난해 전 세계 200여 개국에 선판매되며 해외 판매만으로 순제작비를 전액 회수했다는 소식은 분명 고무적입니다. 그런데 이 뉴스가 흥분보다 먼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면, 저만 이상한 걸까요?
같은 시기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EFM(유럽필름마켓)에서는 "살 만한 한국영화가 없다"는 바이어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EFM이란 매년 베를린국제영화제와 함께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필름 거래 행사 중 하나로, 전 세계 배급사와 판권 구매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업계의 핵심 시장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온 불만 섞인 목소리는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극장에서 스크린 1천 개관 이상으로 개봉한 한국영화는 전년보다 9편 줄어든 16편에 그쳤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투자 시장이 팬데믹 이후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면서 신작 공급 자체가 말라붙었고, 그 여파가 유럽 필름마켓에까지 고스란히 전해진 셈입니다.
제가 참석하는 영화 비평 소모임에서도 지난 주(26년 4월 20일)에 비슷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한 회원이 "좀비나 오컬트 장르의 자극적 공식만으로는 유럽 관객을 계속 설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는데, 저도 속으로 크게 공감했습니다. 실제로 <파묘>가 천만 돌풍을 일으킨 뒤 해외 바이어들이 비슷한 한국형 호러를 고가에 사들였다가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면서, 한국 판권이 실제 흥행 가치 대비 비싸다는 인식이 유럽 시장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영화 시장가는 전반적으로 하락 조정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파묘가 열어놓은 오컬트 열풍이 해외에서 어떻게 소비됐는지는 저의 다른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유럽 메이저 배급사들이 경쟁적으로 구매에 나서는 한국영화 브랜드는 현재 박찬욱·봉준호 두 감독뿐이라는 현업 관계자들의 진단이 허풍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장 의존 구조와 공동제작이라는 돌파구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요? 현업에서 나오는 해법 중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이 바로 다국적 공동제작입니다.
공동제작이란 두 개 이상의 국가 제작사가 자본, 인력, 유통망을 함께 엮어 영화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단순히 돈을 같이 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지 배급망과 영화제 진출 경로까지 공유한다는 점에서 순수 해외 세일즈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정주리 감독의 신작 <도라>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순제작비 20억 원대 규모의 이 영화는 제작비의 약 20%를 프랑스(아르떼 TV 판권)와 룩셈부르크(투자 펀드)에서 조달했고, 올해 칸국제영화제 감독 주간 부문 초청이라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정 감독의 전작 <다음 소희>가 프랑스에서 국내 총 관객 수에 맞먹는 9만 명 이상을 동원한 트랙 레코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연결이었습니다. 트랙 레코드란 과거 작품들이 실제 시장에서 거둔 성과 이력을 뜻하며, 해외 투자 유치와 바이어 설득에서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가 됩니다.
북미에서는 이런 협업이 더 다채롭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재미교포 스테파니 안 감독의 데뷔작 <베드포드 파크>는 배우 손석구가 주연과 프로듀서를 겸하며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선댄스영화제에서 미국 드라마 부문 신인 감독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뒤 소니 픽쳐스 클래식이 배급권을 확보했습니다. 창작자가 기획 단계부터 주도권을 쥐고 메이저 유통망까지 연결한 구조입니다.
유럽 시장에서 한국영화의 현재 위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거장 감독(박찬욱·봉준호)의 슈퍼패키지 작품: 유럽 메이저 배급사들의 구매 경쟁이 붙는 최상위 티어
- 홍상수·이창동 등 작가주의 감독 영화: 유럽 예술영화관(아트하우스)에서 꾸준한 소비
- 아시아 액션·호러 장르물: 마니아 관객 대상 중소 배급사 중심의 제한적 유통
- 그 외 중소 규모 한국영화: 바이어 관심 급감, 판로 현저히 좁아짐
제 경험상 이 구조가 더 고착될수록, 신인 감독이나 중간 규모 영화가 유럽 시장에서 숨 쉴 공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K'라는 후광 너머, 이야기 자체의 힘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공동제작이 진짜 돌파구가 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저는 이것이 단순히 자금 조달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공동제작 붐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국내 투자 시장이 메말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외 자본을 끌어오는 '비자발적 생존 전략'에 가까운 측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흐름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MG(미니멈 개런티)라는 개념을 알고 계신가요? MG란 콘텐츠 계약에서 판권 공급자가 유통사로부터 사전에 약정받는 최소 보장 수익금을 뜻합니다. <어쩔수가없다>의 MG가 <기생충> 대비 6년 만에 5배가량 올랐다는 것은 거장 감독의 브랜드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혜택이 극소수에게 집중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중간 지대가 사라지고 있는 셈입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은(출처: 미국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 K-컬처의 외연이 영화를 넘어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한국 문화와 외국 제작사의 합작이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성공이 반복되려면, 'K'라는 수식어를 마케팅의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 자체가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소모임 토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발언은 이것이었습니다. "유럽 관객은 한국영화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찾아 온다."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한국 영화 산업이 유럽 시장에서 거장 두 명의 브랜드에만 기대는 구조를 벗어나려면, 공동제작을 단순한 자금 조달 수단이 아닌 이야기의 질적 도약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그 변화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이 경고등을 똑바로 보는 것이, 그 변화를 앞당기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럽 필름마켓의 바이어가 다시 한국영화 부스 앞에서 설레는 날을 기대하면서, 칸 필름마켓의 결과를 주의 깊게 지켜볼 생각입니다.
참고: https://magazine.kofic.or.kr/webzine/web2/2799/pdsView.do
웹매거진 한국영화
경고등의 의미를 확인할 때
magazine.kofic.or.kr
<함께 보면 좋을 포스팅>
<파묘>가 열어놓은 오컬트의 문, K-호러는 로컬리티의 함정을 넘을 수 있는가(로컬리티, 흉가, 확
2024년 초봄, 자정이 넘은 시각 종로의 한 영화관에서 진행된 비명 상영회 현장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장재현 감독의 《파묘》가 스크린을 채울 때, 관객들은 단순한 공포를 넘어 우리 민족의 심
goldensangsang.com
'영화 산업 및 문화 분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영화 흥행 지표 (관객 수, 매출액, KOBIS) (0) | 2026.04.28 |
|---|---|
| 넷플릭스-워너 인수합병 (독점, 창의성, 극장) (1) | 2026.04.23 |
| 큐레이션 OTT (알고리즘, 취향, 생존전략) (0) | 2026.04.23 |
| K-컬처의 황금알, 유니버스인가 자본의 신기루인가: K-세계관의 가능성과 한계 (유니버스, 트랜스미디어, 자생) (0) | 2026.04.19 |
| 25억 달러 투자의 끝, K-콘텐츠는 넷플릭스의 글로벌 하청 기지로 남을 것인가(생존, 재편, IP 주권) (0) | 2026.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