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인 5월을 맞이하여, 많은 가족단위 행사가 열리고 있다. 행사를 구경하다가 여성인권에 대한 행사 현수막을 보았고, 작년 벡델데이 때 일기를 쓴 것이 기억이 났다. 25년 벡델 행사를 참여기를 올려보고자 한다.
KU시네마테크 앞에 줄이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평일 낮, 홍보가 크게 된 행사도 아닌데 자리를 채운 관객들이 꽤 있었습니다. 20대 여성이 많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중년 남성 관객도 눈에 띄었고, 영화 관계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습니다. 이 행사가 벌써 6회째라는 사실이 그때서야 실감 났습니다. 처음에는 '성평등 영화제'라는 타이틀만 보고 특정 관객층을 위한 행사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현장 분위기는 그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벡델데이 2025는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영화진흥위원회가 후원하는 성평등 콘텐츠 페스티벌입니다. 매년 9월 첫째 주 양성평등주간에 맞춰 열리며, 그해 가장 성평등한 영화와 시리즈를 '벡델초이스10'으로 선정하고, 성평등에 기여한 창작자를 '벡델리안'으로 호명합니다. 25년에는 9월 6일과 7일, 이틀간 무료 상영과 토크 행사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벡델 테스트,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간단해 보였다
솔직히 처음 '벡델 테스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저는 별로 대단한 기준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름 있는 여성 캐릭터 두 명이 등장해서, 남성과 무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 통과라는 기준이 너무 낮아 보였거든요. 대부분의 영화가 이 정도는 충족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올해 한국영화 개봉작 182편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24년 한국영화 성인지 결산'에 따르면 전국 10개 이상 스크린에서 개봉한 실질 개봉작을 대상으로 진행한 심사에서 본심에 오른 작품은 30편, 최종 선정작은 10편에 불과했습니다. 182편 중 10편. 비율로 따지면 약 5.5%입니다.
벡델데이가 적용하는 조항은 원래 3개에서 한국 환경에 맞게 7개로 확장된 기준입니다. 주요 스태프 중 여성이 1인 이상 포함될 것, 여성 단독 또는 동등 비중의 주연일 것,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이 추가됩니다. 이 조항들을 하나씩 읽으면서 저는 꽤 찔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조항이 그랬습니다. '스테레오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준 앞에서, 최근 본 한국 상업영화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남성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촉매제, 위기의 순간에 납치되는 존재, 사랑스럽게 웃으며 응원하는 역할. 그 이상을 받지 못한 여성 캐릭터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현장에서 들은 말: "드러내서 극복하는 게 우리의 임무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벡델리안과의 만남' 토크였습니다. 주제는 '장르와 서사에서 지분을 확보한 여성 캐릭터'였는데, 단순한 수상 소감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창작자들이 여성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실제로 어떤 저항에 부딪혔는지를 꽤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배우 이혜영은 <파과>를 통해 벡델리안 배우상을 받았습니다. '원앤온리! 배우 이혜영. 여성 배우의 경계를 확장하다'라는 제목의 토크에서 그는 노년 여성이 액션 누아르의 중심에 선다는 설정 자체가 얼마나 낯선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낯섦을 어떻게 설득해나갔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민규동 감독도 함께 자리해 캐릭터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이 설정이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싸웠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말 중 하나가 오래 남습니다. "드러내서 극복하는 게 우리의 임무다." 문제를 감추거나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정면으로 꺼내야 한다는 태도. 그게 벡델데이라는 행사가 매년 열려야 하는 이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파과>가 보여준 것은 단순히 '노년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 영화'가 아닙니다. 그 캐릭터가 나이와 성별로 인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장르적 문법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그게 관객에게 닿았고, 상업적으로도 유의미한 반응을 얻었습니다. 성평등한 서사가 흥행과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였습니다.
냉정하게 보자: 숫자는 긍정적인데, 왜 현장은 여전히 답답한가
올해 한국영화 성인지 결산 수치는 표면적으로 개선 흐름을 보여줍니다. 2024년 실질 개봉작 기준 여성 감독 비율 24.0%, 여성 주연 48.1%, 여성 각본가 34.7%로 전년 대비 대부분의 직종에서 상승했습니다. 숫자만 보면 꽤 고무적입니다.
그런데 현장의 체감은 다릅니다. 그리고 데이터를 좀 더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보입니다.
첫째,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격차가 숫자를 희석시킵니다. 여성 감독 비율 24%는 개봉작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치입니다.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상업영화로 범위를 좁히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올해 벡델초이스10 영화 부문 선정작 10편 중 7편이 남성 감독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이 현실을 드러냅니다. 성평등한 서사를 만드는 데 성별을 불문하고 참여한다는 긍정적 신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 감독 자체가 대형 프로젝트에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가 여전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둘째, OTT가 오히려 역행하고 있습니다. 개봉작 시장에서 여성 인력 비율이 전반적으로 상승한 것과 달리, OTT 오리지널 영화에서는 여성 인력의 빈도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 콘텐츠 산업의 무게중심이 극장에서 스트리밍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데, 정작 그 공간에서는 역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OTT는 다양성의 확장 공간이라는 기대와 달리, 플랫폼 알고리즘이 선호하는 클릭 유발형 콘텐츠 위주로 쏠리면서 오히려 성비 불균형이 강화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 '서브 주연' 여성 캐릭터 문제는 아무도 크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벡델초이스10에 선정된 작품들은 여성 주연의 입체성을 잘 구현했습니다. 그런데 선정되지 않은 나머지 상업영화들을 보면 다른 그림이 펼쳐집니다. 남-남 주연 구도가 늘어나는 가운데, 여성 캐릭터는 구색 맞추기 수준의 역할로 등장하는 사례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위로하거나 동기를 부여하거나 위기에 처하거나. 이 세 가지 기능 외에 여성 서브 주연이 독립적인 서사를 갖는 경우는 여전히 드뭅니다. 이건 데이터로 잡히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넷째, 신인 여성 감독의 진입 장벽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국영화 개봉작 자체가 급감하고 있는 시장 상황에서, 제한된 투자가 검증된 감독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미 트랙 레코드가 부족한 신인 여성 감독에게는 이중의 장벽이 됩니다. 시장이 수축할수록 다양성보다 안전한 선택이 우선시되고, 그 '안전한 선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벡델데이가 매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수치가 조금씩 개선된다고 해서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표면의 숫자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계속 들여다보지 않으면, 개선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제자리걸음일 수 있습니다.
2026년 벡델데이가 기대되는 이유
행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이 행사가 6년째 열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성과라는 것입니다.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자리는 쉽게 소비되고 쉽게 잊힙니다. 특정 사건이 터지면 반짝 주목받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잠잠해지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매년 같은 계절에 같은 자리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자리를 찾는 관객이 6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행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2026년 벡델데이에서는 어떤 작품이, 어떤 이름이 호명될지 궁금합니다. 올해 선정작들이 만들어놓은 흐름이 이어진다면, 내년에는 조금 더 넓어진 지형도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OTT 부문에서 역행하고 있는 흐름이 내년 결산에서는 어떻게 나타날지, 신인 여성 감독의 상업영화 진입이 조금이라도 열릴지가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지점입니다.
성평등한 콘텐츠가 즐거운 세상을 만든다는 이 행사의 슬로건이 구호로 그치지 않으려면, 결국 매년 이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실제 제작 현장과 투자 결정의 테이블 위에 올라야 합니다. 벡델데이가 그 연결고리 역할을 계속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내년 9월, 또 이 자리를 찾을 것 같습니다.
참고 자료
영화진흥위원회 웹매거진 한국영화 · 영화진흥위원회 '2024년 한국영화 성인지 결산' · 벡델데이 공식 인스타그램 @bechdel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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