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거대한 '영희' 인형 앞에 섰을 때, 숨을 멈추게 됐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극장을 넘어 현실 공간으로 확장되는 영화 IP(지식재산권)의 흐름,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 콘텐츠가 어디쯤 서 있는지 짚어봤습니다.

테마파크가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닌 이유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나서 '저 세계에 실제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 한 번쯤 해보지 않으셨나요? 그 욕망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 바로 현재의 IP 기반 공간 콘텐츠입니다.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란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캐릭터·세계관·스토리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의미합니다. 디즈니랜드가 단순한 놀이기구 모음이 아니라 '디즈니 세계관의 현실 구현체'로 기능하는 것도 이 IP를 어떻게 공간화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도쿄에 있는 지브리 미술관은 그 방향성이 조금 다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박물관에 가깝습니다. 화려한 어트랙션 대신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손때와 고민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반면 2022년에 문을 연 지브리 파크는 몰입형(immersive) 테마파크에 가깝습니다. 몰입형이란 관람객이 단순히 전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 세계 안에 직접 들어온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방식을 말합니다. 두 공간이 같은 IP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LA, 파리, 홍콩에 위치한 마블의 어벤져스 캠퍼스는 더 나아갑니다. 방문객이 쉴드(S.H.I.E.L.D.)의 신입 요원이 되어 MCU(Marvel Cinematic Universe,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관에 직접 참여하는 구조입니다. 단순히 캐릭터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는 설계 의도가 분명합니다.
몰입형 체험이 보여준 것과 감춘 것
지난해 9월, 저는 서울에서 열린 '오징어 게임: 더 익스피리언스'를 직접 다녀왔습니다. 솔직히 기대 반, 의심 반이었습니다. '어차피 인생샷 찍는 곳 아닐까?'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핑크 가드들이 무심하게 지시를 내리고, 미로 같은 세트장이 주는 압박감이 쌓이면서 그 생각은 금방 사라졌습니다. 특히 영희 인형 앞에서 센서에 걸릴까 봐 숨을 참고 멈춰 서 있었을 때, 저는 정말 생존 게임의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귓가에 게임 음악이 맴돌았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좋았던 만큼, 뒤돌아서면서 드는 찜찜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주변 관람객 상당수가 콘텐츠에 몰입하기보다는 각도 좋은 포토 스폿을 찾아다니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어벤져스 캠퍼스나 해리 포터 스튜디오 후기들을 봐도 비슷합니다. 인생샷 포인트 정리가 실제 체험 후기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는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공간이 어떤 '동선'을 유도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관람객이 스스로 사유할 틈을 주는 설계냐, 아니면 인증 욕구를 자극하는 포토 스폿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설계냐. 전자는 지브리 미술관 방식에 가깝고, 후자는 소셜미디어 바이럴을 노린 공간 마케팅에 가깝습니다.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지만, 지금은 후자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글로벌 IP 전략,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유니버설 스튜디오 베이징의 사례는 꽤 교과서적입니다. 이 공간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IP와 중국 현지 IP를 동시에 운영합니다. 특히 '쿵푸팬더: 랜드 오브 어썸니스'는 베이징에서만 볼 수 있는 테마 구역입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기술력에 중국 문화의 정서를 얹은 이 전략은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의 모범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로컬라이제이션이란 글로벌 콘텐츠를 특정 지역의 문화적 정서에 맞게 재구성하는 전략을 말합니다.
반면 디즈니는 자사 IP를 안으로 깊게 파고드는 방식을 씁니다. 2010년 개봉한 라푼젤은 영화 한 편에서 시작해 단편 시리즈, TV 애니메이션, 도쿄 디즈니씨의 테마 구역, 게임, 상품 라인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입니다. 하나의 IP를 여러 플랫폼과 매체에 걸쳐 유기적으로 확장하면서 팬들이 어느 접점에서 만나든 일관된 세계관을 경험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 두 전략의 차이는 규모가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라면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자사 IP를 얼마나 깊게 팔 것인가, 아니면 현지 시장을 얼마나 넓게 포용할 것인가. 한국 입장에서는 두 전략 모두 참고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한국 영상 콘텐츠는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시장에서 미국 다음으로 높은 시청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전자신문). 콘텐츠 경쟁력 자체는 이미 검증된 셈입니다. 문제는 그 경쟁력이 테마파크나 체험 공간 같은 오프라인 IP로 얼마나 연결되고 있느냐입니다. 과연 우리의 콘텐츠는 글로벌3.0시대에 경쟁력을 갖추고 있느냐를 고민해야합니다.
한국 IP의 공간 콘텐츠 가능성
그렇다면 한국 콘텐츠 중에서 공간으로 확장할 만한 IP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다음 세 가지가 가장 현실적인 후보입니다.
- 오징어 게임: 이미 서울, 뉴욕, 마드리드, 시드니에서 몰입형 체험 공간 '오징어 게임: 더 익스피리언스'가 운영됐습니다. 미술적 완성도가 높은 세트 공간을 실제로 재현했을 때 충분히 팬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걸 직접 확인했습니다. 성인 대상 서바이벌 체험형 테마파크로의 확장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 킹덤: '조선 좀비'라는 설정은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보편적인 소재와 조선 시대 궁궐·마을이라는 독특한 공간감의 결합입니다. 좀비와의 추격전을 어트랙션으로 구성하거나 VR 기반 서바이벌 게임으로 확장하는 방향이 가능합니다.
- 기생충: 반지하와 고급 저택이라는 극명하게 분리된 공간 구조는 몰입형 체험 전시나 이스케이프 룸(탈출 게임) 포맷과 잘 맞습니다. 봉준호 감독이라는 이름값 자체가 글로벌 관심을 끌어올 수 있는 브랜드 자산입니다.
공간 콘텐츠라는 흐름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흐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냉정하게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글로벌 IP 공간 시장은 검증된 소수의 메가 IP가 오프라인 공간까지 독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습니다. 극장에서 대작 위주 편성이 독립영화를 밀어내듯, 테마파크와 몰입형 체험 공간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이 그 흐름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면, 그 바깥에 있는 중간 규모 한국 IP들은 또다시 설 자리를 잃는 셈입니다. 유럽 필름마켓에서 바이어들이 "살 만한 한국영화가 없다"고 했던 그 구조적 공백이, 오프라인 공간 시장에서도 그대로 재연될 수 있다는 점을 한국영화 유럽 시장 분석 글에서 함께 읽으면 이 흐름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IP가 지속 가능한 공간 콘텐츠로 자리잡으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저는 세 가지가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IP 확장의 시작점은 오리지널 서사의 깊이여야 합니다. 영희 앞에서 숨을 참던 그 순간이 작동한 것은 화려한 세트 때문이 아니라, 시즌 1에서 이미 그 공간에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입니다. 공간이 먼저가 아니라 이야기가 먼저입니다.
둘째, 소수 거장 IP에 집중된 구조를 분산시키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중간 규모 IP가 공간 콘텐츠로 실험할 수 있는 소규모 몰입형 전시나 팝업 체험 공간에 대한 지원이 없다면, 이 시장도 결국 자본력 있는 소수의 독점으로 끝날 것입니다.
셋째, 로컬라이제이션과 트랜스미디어 전략을 동시에 고민해야 합니다. 유니버설 베이징처럼 현지 정서를 녹이는 것과, 디즈니처럼 하나의 IP를 여러 플랫폼으로 유기적으로 확장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병행의 문제입니다.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저력은 이미 OTT 시청 데이터로 검증됐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저력을 오프라인 공간으로 번역하는 전략과 실행력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공간화할 것인지, 그 선택이 앞으로 한국 엔터테인먼트 IP의 깊이를 결정할 것입니다. 보는 것과 들어가는 것은 확실히 다릅니다. 그리고 '들어갈 만한 세계'를 만드는 것은, 결국 이야기를 얼마나 깊게 쌓아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참고: https://magazine.kofic.or.kr/webzine/web2/2639/pdsView.do
웹매거진 한국영화
지브리 미술관부터 마블 캠퍼스까지
magazine.kof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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