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 정책개발팀이 올해 5월 칸국제영화제 현장에서 작성한 리포트를 읽다가, 한 문장에서 한참 멈춰 섰습니다. 유럽시청각관측소(EAO)가 발표한 2025년 세계 영화산업 분석 보고서 'FOCUS 2026'을 소개하면서, 리포트 필자들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시장이 2025년 세계 영화산업 회복을 주도했다는 분석은 분명 고무적이었지만, 그 중심에 한국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한 문장이 유독 마음에 걸렸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K-콘텐츠의 세계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성취, 감독 프랜차이즈까지 만들어낸 한국 영화산업의 저력을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세계 영화산업을 조망하는 국제 보고서에서, 아시아 시장의 회복을 이야기할 때 한국이라는 이름은 빠져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50억 관객이 돌아왔다, 그런데 한국은 어디에
FOCUS 2026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극장 관객 수는 약 50억 명으로, 팬데믹 이전 대비 약 72% 수준까지 회복했습니다. 전년 대비로는 3% 증가한 수치입니다. 그리고 이 회복을 이끈 중심에는 아시아 시장, 특히 중국과 일본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성과는 특히 두드러집니다. 일본은 주요 영화시장 가운데 유일하게 팬데믹 이전 관객 수준을 넘어선 국가로 소개됐습니다. 2025년 일본 박스오피스 상위 20편 중 14편이 자국 영화였고, 미국영화 점유율은 약 20% 수준에 그쳤습니다. 대부분의 나라 영화산업이 할리우드에 종속적인 구조를 가진 것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입니다. 게다가 2025년 일본 영화 관객의 약 45%가 해외시장에서 발생했습니다. 강력한 자국 콘텐츠로 내수 시장을 지키면서, 동시에 해외에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만든 것입니다.
이 성과가 왜 중요한지는 일본 경제산업성(METI) 관계자의 설명에서 드러납니다. 2020년을 기점으로 해외 매출이 더 이상 '보너스'가 아니라 내수 시장 규모를 넘어서는 핵심 시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 인식 전환이 제작비 증가와 투자 확대로 이어졌으며, 결국 콘텐츠 품질 향상이라는 선순환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최근 일본의 콘텐츠 산업 지원 예산은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METI 관련 예산은 세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일본영화의 글로벌 부상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흥행 사건이 아니라, 정부가 투자와 제작과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재설계한 결과였던 셈입니다.
한국은 왜 이 명단에서 빠졌을까
솔직히 이 대목에서 억울한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한국은 『기생충』으로 칸과 오스카를 동시에 석권했고, 『오징어 게임』으로 넷플릭스 역사를 새로 썼고, 『군체』는 연상호 감독이라는 이름 하나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그런데 왜 세계 영화산업 회복의 서사에서 한국은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 취급을 받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개별 작품의 성취'와 '산업 전체의 구조'를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군체』는 모두 뛰어난 개별 사례입니다. 그러나 EAO 같은 국제 기관이 국가 단위로 산업을 평가할 때 보는 것은 개별 히트작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성장입니다. 일본이 주목받은 이유는 특정 영화 한 편이 잘 됐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해외시장을 핵심 전략으로 설정하고 예산을 세 배로 늘리는 정책적 전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훌륭한 개별 작품들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산업 전체의 구조적 성장 서사가 국제 사회에 아직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프』의 해외판매 전략을 다룬 글에서도 짚었지만, 최근 한국 영화 몇 편이 시도한 해외 우선 판매 전략은 분명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부 정책 차원의 전방위적 재설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개별 제작사와 감독들의 산발적인 시도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이 보여준 것은 민간의 성공을 정부가 뒤따라가며 제도화한 사례입니다. 한국은 아직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극장은 콘텐츠 부족으로 죽어간다
같은 리포트에서 소개된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NC)의 '글로벌 극장 트렌드' 연구도 뼈아픈 지점을 짚습니다. 세계 영화시장이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를 관객 감소가 아니라 콘텐츠 공급 부족에서 찾은 것입니다. 특히 중저예산 영화와 다양한 장르영화가 줄어들면서, 관객이 극장에 갈 이유 자체가 줄었다는 분석이었습니다.
이 분석은 한국 상황과 정확히 겹칩니다. 팬데믹 이후 한국에서도 중저예산 영화의 공급이 눈에 띄게 위축됐고, 이는 곧 전체 시장의 관객 감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티켓 할인 정책을 다룬 글에서 짚었던 것처럼, 6천 원 할인권으로 관객을 일시적으로 끌어모을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콘텐츠 공급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CNC의 연구가 정확히 지적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흥행을 보장하는 블록버스터 한 편, 천만 영화 한 편으로는 극장 생태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영화가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구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극장 시장이 빠르게 회복하고 있는 국가들의 공통점입니다. 일본, 베트남처럼 강력한 자국 영화산업을 보유한 나라들이 회복세를 이끌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와 문화에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원한다는 신호입니다. 한국의 『왕과 사는 남자』 흥행도 이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로컬 콘텐츠에 대한 수요는 분명 살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수요를 지속적으로 채워줄 다양한 규모의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국이 놓치고 있는 것: 정책의 전방위적 재설계
이 리포트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일본의 성공도, 유럽의 정책 전환도, 결국은 정부가 산업의 방향을 전방위적으로 재설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유럽 영화산업이 자동지원 확대, 제작 인센티브 확대, 스트리밍 플랫폼 투자 의무 확대라는 세 가지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던 유럽의 전통적 정책 기조가, 이제는 산업적 경쟁력 강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산업에 필요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개별 작품의 흥행이나 특정 감독의 브랜드력에 기대는 것을 넘어, 정부 차원에서 해외시장을 핵심 전략으로 명확히 설정하고, 그에 맞는 예산과 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일본이 5년 만에 콘텐츠 산업 지원 예산을 두 배 이상, 관련 부처 예산을 세 배 가까이 늘렸다는 사실은, 한국의 현재 지원 규모와 속도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세계 영화산업이 회복하는 이 시점에, 한국이 다시 그 회복의 중심 서사에 이름을 올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훌륭한 영화를 계속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토양, 즉 중저예산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고, 해외시장 진출이 개별 제작사의 모험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가 되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다음번 세계 영화산업 보고서에는, 아시아 시장의 회복을 이야기할 때 한국의 이름이 당연하게 들어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참고: 영화진흥위원회 웹매거진 한국영화 「절박하고 진지한 균형 찾기 — 7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세계 영화산업의 변화」(김희영·김수빈,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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