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영화관 앞에 걸린 포스터를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극장에 마블 영화 포스터가 걸리듯, 저 멀리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에서는 '연상호'라는 이름 석 자가 그런 신뢰의 상징이 되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처음엔 과장된 상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군체』의 말레이시아 흥행 기록을 보고 나니, 이건 상상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현실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 역대 한국 영화 흥행 순위 1위가 『군체』, 2위가 『부산행』, 3위가 『반도』입니다. 전부 연상호 감독의 좀비 스릴러입니다. 한 나라의 한국 영화 흥행 역사를 한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독점하고 있는 이 기록을, 저는 단순한 우연이나 개인기로 넘길 수 없었습니다. 이건 분명 구조적인 현상입니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
『군체』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가진 뒤, 5월 21일 개봉과 함께 아시아 전역의 극장가를 그대로 휩쓸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151만 관객, 인도네시아에서 106만 관객을 동원하며 각각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와 2위를 기록했고, 필리핀에서도 34만 관객으로 역대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싱가포르, 대만, 태국에서는 톱5 안에 들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누적 524만 관객으로 올해 두 번째 500만 돌파 작품이 됐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지점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박스오피스 모조 기준으로 동남아시아 3개국(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합산 관객 수만 따져도 약 292만 명으로, 이는 한국 내 관객 수의 절반을 넘습니다. 국내 흥행과 별개로 동남아시아 시장 자체가 이 영화의 두 번째 본진이 된 셈입니다.
10년간 쌓인 신뢰, 그리고 그 실체
이 흥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10년에 걸쳐 축적된 '감독 브랜드'가 그 배경입니다. 해외 배급사들의 반응이 이를 구체적으로 증명합니다. 일본 배급사 Gaga는 『반도』를 통해 쌓은 연상호 감독에 대한 신뢰를 언급했고, 프랑스 배급사 ARP는 『부산행』 이후 이번이 세 번째 협업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쇼박스가 칸 프리미어가 열리기도 전에 120개 이상의 테리토리에 배급권을 사전 판매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신뢰가 산업적으로 얼마나 실체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기술 인프라의 시너지도 더해졌습니다. 『군체』는 12개국 118곳의 4DX·스크린X 특별관에서 상영되며 해외 매출 170만 달러를 별도로 기록했습니다. 한국이 개발한 콘텐츠가 한국이 개발한 상영 기술과 만나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구조입니다. 콘텐츠 하나가 흥행하면, 그 콘텐츠를 상영하는 기술까지 함께 수출되는 이중 구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콘텐츠 수출과 기술 수출이 서로를 강화하는 선순환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4DX나 스크린X 같은 특별관 기술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산업이지만, 그 기술이 진가를 발휘하려면 그 안에서 상영할 만한 압도적인 콘텐츠가 필요합니다. 좀비가 무리 지어 몰려드는 『군체』의 장면들은 4DX의 진동과 스크린X의 확장된 시야각과 만났을 때 극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콘텐츠가 기술의 쇼케이스가 되고, 기술이 콘텐츠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구조입니다.
IP가 아니라 사람이 자산이 되는 방식
이 지점에서 짚어야 할 개념이 있습니다. '감독 프랜차이즈(Director Franchise)'입니다. 할리우드식 프랜차이즈는 보통 마블처럼 하나의 세계관과 캐릭터를 IP로 삼아 여러 작품을 이어 붙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연상호 감독의 좀비 3부작, 『부산행』과 『반도』와 『군체』는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완전히 독립된 작품들입니다. 등장인물도 이어지지 않고, 세계관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 작품은 '연상호의 좀비 영화'라는 하나의 브랜드로 관객에게 인식되고, 그 브랜드가 흥행을 견인합니다.
이건 기존의 IP 중심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자산 개념입니다. 캐릭터나 세계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창작자의 이름과 스타일 자체가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K-게임 IP의 영화화 가능성을 다룬 글에서 IP를 지키면서 협업하는 구조를 이야기했는데, 감독 프랜차이즈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형태입니다. IP 자체가 필요 없이, 창작자의 이름만으로 다음 작품에 대한 신뢰가 자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 영화의 해외 진출에는 크게 두 갈래 경로가 있습니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 개척한 '작품성과 사회적 메시지'의 경로, 그리고 『부산행』에서 『군체』로 이어지는 '장르적 보편성'의 경로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콘텐츠의 해외 성공 사례는 대부분 전자로 설명됐습니다. 그런데 감독 프랜차이즈는 후자의 경로가 얼마나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건 한 편의 걸작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신뢰의 축적입니다.
왜 이 축적이 중요한지는 투자와 배급의 관점에서 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새로운 감독의 새로운 작품에 투자하는 것은 매번 처음부터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세 편 연속으로 흥행을 증명한 감독이라면, 배급사 입장에서는 개봉 전부터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수익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쇼박스가 칸 프리미어 전에 120개 테리토리를 사전 판매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 예측 가능성 덕분입니다. 감독 프랜차이즈는 창작자에게는 브랜드가 되고, 투자자에게는 리스크를 줄이는 보험이 되는 셈입니다.
다만, 이 성취에는 그늘도 있다
그러나 이 흥행 기록을 온전히 축하만 할 수는 없습니다. 원문 자료가 스스로 짚은 대목이 있습니다. 8월로 예정된 북미 개봉은 아시아를 넘어선 시장 확장의 시험대입니다. 아시아권에서의 압도적인 성취가 서구 시장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될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흥행이 지나치게 '연상호의 좀비'라는 특정 조합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파묘』가 말레이시아에서 좋은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군체』 개봉 3일 만에 그 순위에서 밀려났습니다. 이 사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른 한국 영화들이 아직 연상호 감독과 동일한 수준의 브랜드 신뢰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현실입니다.
『호프』의 해외판매 전략을 다룬 글에서도 짚었지만, 한국 영화산업이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흥행 공식을 찾아가는 시도들은 여러 갈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식들이 특정 감독이나 특정 작품 한 편에만 의존한다면, 산업 전체의 지속 가능성으로 이어지기는 어렵습니다. 한 감독의 독점이 진짜 '공식'이 되려면, 그 성취가 다른 창작자들에게도 확산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식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연상호 감독의 좀비 3부작이 만들어낸 이 기록은 분명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IP를 소유하지 않고도, 창작자 개인의 이름과 스타일을 브랜드로 만들어 반복적인 신뢰를 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할리우드의 프랜차이즈 문법과는 다른, 한국 영화산업만의 독자적인 자산 축적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군체』는 아직 '공식'이 아니라 하나의 '사례'에 가깝습니다. 다른 감독들이 각자의 장르에서 같은 방식으로 신뢰를 쌓아갈 때, 그리고 그 신뢰가 특정 국가를 넘어 여러 시장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이것이 한국 영화산업 전체가 활용할 수 있는 진짜 공식이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이 훌륭한 기록을 축하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반복 가능한 구조인지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8월 북미 개봉이 어떤 성적을 낼지, 그리고 그다음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 이 브랜드를 어떻게 이어갈지, 저는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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