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들렀다가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매대 맨 앞줄에 놓인 책 한 권을 보고 걸음을 멈춘 적이 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 각본집이었습니다. 영화는 이미 봤지만 굳이 각본집까지 사야 하나 싶어 한참을 서서 뒤적였습니다. 그런데 대사가 아니라 지문을 읽다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영화에서 스쳐 지나갔던 장면 하나하나에 이렇게 섬세한 지시문이 붙어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결국 계산대로 가져갔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책, 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출간 전 예약판매만으로 4쇄를 찍었고,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지금까지 9쇄 2만 5천 부가 팔렸습니다.
1,690만 관객을 넘긴 영화의 성공이야 그렇다 쳐도, 종이책 한 권이 이 정도로 팔린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장을 좀 더 들여다봤습니다. 그 안에는 생각보다 정교한 흥행 공식이 있었습니다.

영화 흥행과는 다른 층위의 게임
한국영화 각본집을 13년째 만들어온 출판사 플레인아카이브의 백준오 대표에 따르면, 각본집 판권 계약은 보통 시사회 즈음 입소문이 나거나 개봉 전 해외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면 출판사들이 배급사에 먼저 제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화제작의 경우 여러 출판사가 동시에 제안서를 넣고 비딩 경쟁을 벌이면서, 선인세 성격의 미니멈 개런티(MG)가 급격히 치솟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문학동네, 창비, 민음사 같은 대형 출판사들까지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 각본집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배급사 쇼박스가 시사회 직후 플레인아카이브에 먼저 출간을 제안했는데, 그동안 여러 홈비디오·출판 작업을 함께 하며 쌓인 신뢰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했던 건 속도였습니다. 연일 흥행 기록을 갱신하던 영화의 기세를 이어가려면, 개봉 직후 빠르게 각본집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이 각본집은 일반 독자만이 아니라 전국의 읍·면 소재 도서관까지 들어갔다고 합니다. 국민영화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넓은 파급력을 갖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팬덤은 무엇을 사는가
각본집 흥행의 첫 번째 동력은 명확히 팬덤입니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 이홍위 역을 맡은 박지훈 배우의 팬덤 영향력이 각본집 흥행의 주요 요인으로 꼽힙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 파급력이 각본집 한 권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박지훈이 출연했던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Class 1』 대본집까지 판매량이 함께 솟구쳤습니다. 이 대본집은 곧 10쇄를 찍는다고 합니다. 영화로 새롭게 그 배우를 좋아하게 된 팬들의 관심이 과거 작품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영화와 시리즈가 서로를 밀어올리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흐름은 박지훈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해진처럼 오랜 시간 다양한 작품에서 신뢰를 쌓아온 배우의 경우, 특정 영화 하나가 화제를 모으면 그 배우가 거쳐온 과거 필모그래피 전체로 관심이 확산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 배우의 스타성이 출판 시장에서는 각본집 한 권이 아니라, 그 배우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아우르는 소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팬덤이 만드는 이 확장 효과는 팬덤이 극장을 살리는 방식을 다룬 글에서 짚었던 원리와 정확히 같습니다. 충성도 높은 관객은 한 작품에 머물지 않고,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걸어온 길 전체를 따라가려 합니다.
다만 백준오 대표는 팬덤을 단순한 '배우 소비'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각본집은 대사만 모아놓은 책이 아니라 지문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영화에서 표현되지 못한 캐릭터의 설정, 화면에 담기지 않은 장면에 대한 궁금증을 각본집을 통해 해소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문은 그 자체로 문학적 완성도가 상당히 높아서, 영화 『캐롤』의 각본집에 담긴 지문들이 한 편의 소설 문장처럼 읽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팬덤이 사는 것은 단지 좋아하는 배우의 이름이 박힌 책이 아니라, 스크린 너머에 숨어 있던 창작의 디테일 그 자체인 셈입니다.
흥행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또 다른 공식
그런데 각본집 시장이 전부 팬덤과 대형 흥행작으로만 굴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플레인아카이브가 낸 첫 정식 출판물은 극장 총 관객 수가 3,400명에 불과했던 영화 『들개』의 각본집이었습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이었던 이 영화는, 소수의 독립영화 팬들 사이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각본집이 개정증보판까지 3쇄를 찍었습니다. 흥행 규모와 상관없이, 영화를 아끼는 소수의 팬덤만으로도 하나의 출판 시장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이 지점이 각본집 시장의 흥미로운 이중성입니다. 대형 흥행작은 팬덤의 규모로 밀어붙이고, 소규모 예술·독립영화는 팬덤의 밀도로 버팁니다. 실제로 『기생충』 각본집은 칸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국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골든글로브 수상 시점에는 품절 사태까지 빚었습니다. 반면 『벌새』, 『너와 나』처럼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은 개봉 시기나 흥행 성적과 무관하게 시간을 두고 조금씩 각본집이 출간되며 꾸준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두 흐름이 각본집 시장을 함께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입니다.
OTT 시대, 판권을 지키는 싸움
각본집 시장에 새로운 변수도 등장했습니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가 한국 콘텐츠 투자를 주도하면서 IP 자체를 가져가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 매체 제작사 입장에서는 판권을 확보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환경입니다. 실제로 코로나19 시기에는 극장용 영화 공급이 줄면서 출판 시장으로 활로를 넓힌 제작사들이 생존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이 흐름을 뚫은 것은 결국 창작자들의 목소리였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을 만든 제작사 대표가 직접 넷플릭스를 설득했고, 연상호 감독이 힘을 보태면서 『지옥』 각본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 성과가 포트폴리오가 되어 『D.P.』 각본집, 『약한영웅 Class 1』 대본집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 영화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물리적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열망이, OTT라는 거대 플랫폼의 벽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셈입니다.
기록으로서의 각본집, 그리고 남은 과제
각본집이 단순한 굿즈가 아니라는 것은 한국영화 아카이빙이라는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흥행과 무관하게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의 자료가 각본집을 통해 기록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국영화 각본집의 절대적인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드라마 대본집 시장이 최근 초과열 상태에 접어든 것과 비교하면, 영화 각본집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시장입니다. 독립영화나 무거운 주제의 상업영화일수록 초판 수익을 내지 못하면 제작비 회수 자체가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각본집 시장이 계속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좋은 영화 한 편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스크린이 꺼지는 순간 사라지지 않습니다. 각본집은 그 감동을 손에 쥘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작업이고, 동시에 한국영화가 어떤 고민과 과정을 거쳐 완성됐는지를 남기는 기록입니다. 한국영화 특수분장을 다룬 글에서도 느꼈지만, 스크린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들 뒤에는 늘 누군가의 세심한 손길과 기록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다. 각본집도 그 의지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1,690만 관객의 영화가 각본집으로도 성공을 거두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진짜 중요한 과제는 관객 3,400명짜리 영화의 각본집도 꾸준히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참고: 영화진흥위원회 웹매거진 한국영화 「"타협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 백준오 플레인아카이브 대표」(김혜선,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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