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하면, 저는 얼마 전까지 "AI로 영화를 만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한 발짝 물러서는 편이었습니다. 기술 데모 영상에서 본 AI 생성 이미지들이 대부분 어딘가 어색했고, 현장 촬영의 날것 같은 질감이나 배우의 눈빛을 AI가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NAB Show 2026에 관한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현장 리포트를 꼼꼼히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AI가 "이런 것도 가능하다"를 보여주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것입니다. 전시장의 화두는 단 하나였습니다. "어떻게 실제 워크플로에 녹이느냐."
AI 이노베이션 파빌리온: 방송 전시회가 달라졌다
NAB Show는 매년 4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기술 전시회입니다. 올해는 5만 8천여 명이 참가했고, 1,100개 이상의 기업이 축구장 8개 규모의 전시 공간을 채웠습니다.
가장 눈에 띄었던 변화는 전시장 한가운데 들어선 'AI 이노베이션 파빌리온'이었습니다. AI 전시사 수는 전년 대비 거의 두 배. 어도비, AWS,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같은 글로벌 기업들과 함께 AI 전문 스타트업들이 기술 데모가 아니라 '실전 솔루션'을 들고 나왔습니다. 콘텐츠 제작 현장의 구체적인 병목을 겨냥한 도구들이었습니다.
흥미로웠던 건 그 파빌리온의 분위기가 기존 방송 장비 전시장과 전혀 달랐다는 점입니다. 카메라와 렌즈를 만져보러 온 방송 엔지니어들 사이에 소프트웨어 개발자, 스타트업 대표,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NAB가 '방송 장비 전시회'에서 '미디어 기술 생태계의 허브'로 완전히 탈바꿈하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크리에이터 참가자는 전년 대비 140% 증가했습니다.
"룰렛이 아니라 연출이어야 한다" — AI 네이티브 영화 제작
현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세션은 AI 영화 제작 플랫폼 마티니(Martini)의 창업자 코 테라이(Koh Terai)의 강연이었습니다. 전직 촬영감독이자 스탠퍼드 디자인공학 석사인 그는 현재 AI 영화 제작의 지형도를 2×2 매트릭스로 제시했습니다.
가로축은 전통 촬영 미디어에서 순수 생성형 AI까지, 세로축은 인간의 수동 창작에서 AI의 완전 자율 창작까지입니다. 그가 말한 핵심은, 현재 틱톡에서 보이는 AI 영화 대부분이 '장인적 AI' 방식, 즉 인간이 AI에서 수십 번의 테이크를 뽑아 하나를 건지는 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룰렛을 하는 것과 같다"는 그의 표현이 오래 남았습니다.
한편 매트릭스의 반대 끝, 즉 하나의 고수준 프롬프트로 AI가 편집과 컷까지 포함한 영상을 자율 생성하는 영역도 이미 현실입니다. 그가 시연한 영상은 스토리보드 없이 AI가 작성한 프롬프트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모든 컷이 AI의 판단이었습니다. 객석이 잠시 조용해졌다는 묘사가 와닿았습니다.
그러나 코 테라이가 강조한 건 낙관도 비관도 아니었습니다. "프리 프로덕션에만 AI를 쓰고 실제 촬영은 현장에서 할 수 있다. 픽업 촬영만 AI로 보충할 수도 있다. 이것은 스펙트럼이다." 완전 자율 AI 영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AI가 쓴 소설이 있는가? 없다. 영상은 그보다 차수 단위로 복잡하다."
그리고 그는 이 변화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인재상에 대해 말했습니다. 촬영과 편집의 경계가 흐려지고, 프롬프트를 쓰려면 편집 문법을 알아야 하고, 편집을 하려면 프롬프트 기술을 알아야 하는 '융합형 인재(Gen AI DP)'. 그 수요는 폭발적이지만 공급은 전 세계적으로 극히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한국 영화 인재들에게는, 뒤집어 보면 기회입니다.
마이크로 시리즈: 60초짜리 에피소드가 110억 달러 산업이 되다
NAB 2026에서 AI만큼이나 뜨거웠던 주제가 마이크로 시리즈였습니다. 편당 60~90초 에피소드로 구성된 버티컬 시리즈, 즉 모바일 화면에 최적화된 초단편 드라마입니다. 아시아에서 먼저 대중화된 이 포맷이 미국 시장에서 연간 110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패널로 오른 인물들이 놀라웠습니다. 전 쇼타임 사장과 전 워너브러더스 TV 사장 출신의 할리우드 최고 경영진들이 마이크로 시리즈 전문 스튜디오를 공동 창업했습니다. 할리우드가 8천만 달러짜리 시리즈 하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시대에, 마이크로 시리즈는 3~4개월 만에 기획부터 공개까지 완료하고, 즉각적인 시청자 데이터로 다음 작품을 설계합니다.
틱톡 기반의 콘텐츠 스튜디오 다르 만 스튜디오는 1억 6천만 구독자를 바탕으로 폭스 엔터테인먼트와 40편 규모의 제작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크리에이터가 IP를 지키면서 전통 미디어와 협업하는 새로운 구조입니다.
한 제작사 대표의 말이 핵심을 찔렀습니다. "퀴비는 모바일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시청 습관을 훈련시키려 했다. 마이크로 시리즈는 틱톡이 이미 만들어 놓은 습관 위에 올라탄 것이다." 그리고 "넷플릭스 쇼를 세로 화면에 우겨 넣는 게 아니라, 훌륭한 버티컬 시리즈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습니다.
K-콘텐츠의 글로벌 영향력, 웹드라마 제작 경험, 강력한 팬덤 문화를 생각하면 이 포맷에서 한국 콘텐츠의 잠재력은 높습니다. 오징어 게임 체험 공간이 보여준 것에서도 다뤘듯이, K-IP는 이미 콘텐츠를 넘어 경험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버티컬 시리즈는 그 확장의 또 다른 창구가 될 수 있습니다.
소버린 AI: 기술보다 먼저 설계해야 할 것
AI가 실험을 넘어 실행으로 넘어가는 순간, 반드시 따라붙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AI를 누가 통제하는가."
소버린 AI(Sovereign AI) 세션에서 유럽방송연합(EBU)의 기술혁신 부국장은 공영방송이 AI를 도입하더라도 시청자의 신뢰, 즉 뉴스의 정확성과 투명성은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습니다. 그가 반복한 표현은 '가드레일 안에서의 혁신(Innovation within guardrails)'이었습니다. 유럽은 EBU를 중심으로 산업 전체가 AI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중입니다. AI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인간의 창작적 개입을 단계별로 기록하는 이른바 '로그북'이 표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가장 실질적인 변화는 미디어 자산 관리(MAM)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AI 기반 메타데이터 자동 생성, 얼굴 인식, 자막 생성으로 대규모 아카이브의 검색성이 혁신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충격적인 통계 하나: AI 콘텐츠 스튜디오 라이브러리에만 5천억 달러 이상의 미수익화 가치가 잠들어 있고, 완성된 콘텐츠 권리의 60% 이상이 아카이브에 방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국영화 아카이브에도 수면 아래 잠든 가치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한국 영화산업에 던지는 질문
5일간의 NAB를 돌아보며 리포트가 남긴 질문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융합형 인재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AI 기술과 영화 문법을 동시에 이해하는 'Gen AI DP'. 전 세계적으로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 영화 교육 기관들이 지금 당장 커리큘럼을 바꿔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 영화산업 위기 분석에서도 다뤘지만, 관객 감소와 OTT 확산이라는 구조적 위기 속에서 AI라는 변수까지 더해졌습니다. 이 변화를 위협으로만 볼 것인지, 기회의 창으로 볼 것인지는 결국 우리가 어떤 거버넌스와 인재 위에 AI를 실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NAB 2026이 보여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AI를 도입할지 말지 고민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습니다. 어떤 원칙 위에서, 어떤 인재와 함께, 어떤 워크플로 안에서 AI를 실행할 것인지. 그 구체적인 설계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참고: 영화진흥위원회 웹매거진 한국영화 「실험에서 실행으로, AI 미디어 지형이 요동친다 — NAB Show 2026 참관기」(심예원, 2026.05.26)
한국 영화 산업 위기 분석 (관객 감소, OTT 확산, 기금 설립 배경)
정책기금 설립은 구조적 해법이 될 수 있는가2020년 이후 한국 영화 산업은 눈에 띄는 변곡점을 맞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장 관객 수가 급감했고, OTT 플랫폼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기존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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